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옥관빈 피살사건 (문단 편집) == 증언의 의문점 == 당시 아나키스트들이 옥관빈을 살해한 후 발표한 옥관빈의 죄상은 다음과 같다. ①국내에서 이미 귀순하여 일제의 밀정으로 상해에 옴, ②무역상을 개설하고 중한 양국 사정을 정탐, ③중국인으로부 터 만여금을 편취, ④신문 및 전단을 활용하여 한국의 혁명자를 이간, ⑤유림대표 김창숙 등 혁명자를 체포케 함, ⑥1932년 제1차 상해사변 때 중국 군정을 정탐하여 일본군에 넘김, ⑦참호용 목재 등을 일본군에 헌납, ⑧폭력단을 조직하여 혁명운동자 암살을 기도, ⑨신변 보호를 위해 일본영사관이 지급한 권총을 과시. 하지만 이 중 대다수가 근거를 확인할 방법이 없는 데다 ⑤의 경우 정작 김창숙은 자신을 밀고한 사람으로 유세백, 박겸을 지목했으므로 사실과 다른 것을 알 수 있다. 그리고 제1차 상해사변 당시 [[일본군]]에 의해 옥관빈의 공장이 파괴되는 등 ⑥과 다소 모순되는 실례가 있어 그 근거가 의심스럽다. [* 김광재, 상해시기 옥관빈 밀정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, 한국 근현대사 연구 63, 2012 , 58~61] 또 총독부 문서 어디에도 옥관빈에 대해 ‘배일선인’·‘불령선인’ 이라는 언급은 있을지언정 그가 총독부의 밀정이라는 증거는 없다. 옥관빈 살해 당시의 상황에 대한 정화암의 증언도 이상하다. 정화암의 주장에 따르면 "옥관빈이 [[흥사단]]원의 아내와 [[불륜]]하고 나오다가 살해를 당했다"고 증언했다가[* 이정식, 김학준,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, 민음사, 2005, 408~409] 다른 회고에선 "옥관빈은 굳게 닫힌 뒷문(철문)의 사잇문을 조용히 열면서 밖으로 몸을 내밀었"으며 "옥관빈은 정사에서 느꼈던 쾌감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 잔인하리만큼 음흉한 미소를 지으면서 사잇문을 조용히 닫고 발길을 옮겼"다가 가슴에 총탄을 명중당해 살해당했으며 "엄형순은 구둣발로 옥관빈의 몸뚱이를 제치고 절명한 것을 확인한 다음 유유히 걸어나와서 인파 속에 묻혔다"고 증언했다.[* 정화암, 어느 아나키스트의 몸으로 쓴 근세사, 자유문고, 1992, 157] 그러나 상하이 프랑스 영사관 경무국 정무과에서 조사한 내용은 정화암의 증언과 다르다. 당시 옥관빈은 사촌인 옥성빈을 방문하려고 그 집에 들른 것이었는데 공공조계 경찰면허 11424번을 소지한 운전사 팅킹당이 운전하는 3572번 자가용을 타고서 옥성빈 집에 도착했던 것이었고 옥관빈은 사촌 집을 나와서 차 쪽으로 걸어오다가 등 뒤에서 여러 총탄을 맞았으며 옥관빈은 차 쪽으로 몇 걸음 걸어가다 보도에 쓰러졌다. 옥관빈 바로 근처에 있었던 운전사는 암살자를 보지도 못했다. 암살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옥관빈을 사살하고 사라진 것이다.[* 국가보훈처, 한국독립운동 사료 : 프랑스 외무부 문서보관소 소장 . 3 2016, 77~79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